본문 바로가기

감상과 후기 사이

에릭요한슨 사진전, 동화적으로 표현한 이면의 현실들

벌써 한달도 전에 관람했지만, 워낙 인상깊고 재미있게 본 탓에 아직까지 여운이 남아있는 전시회가 있습니다. 에릭 요한슨 Erik Johanson, 요즘 아주아주 핫한 비주얼 아티스트지요. 성남 큐브 미술관에서 전시 중인데,  아이고 어른이고 그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그의 작품들을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상상을 찍는 사진 작가'라는 별칭의 스웨덴 출신의 이 젊은 비주얼 아티스트는, 직접적인 실사 촬영과 심혈을 기울인 포토샵 리터칭을 통해 트렌디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재기발랄하면서도 무엇보다 환상적인 작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전시는 3월말까지 계속 되니 기회가 되시면 꼭 한번 가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CJ ONE 할인을 받아, 조금 저렴하게 입장권을 끊었더랬습니다. 전시회에서는 작품의 구상, 촬영, 편집의 전 과정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동화스럽기도, 사실적이기도, 우화스럽기도 한 그의 작품들은 아이나 어른, 그 누구에게나 감수성과 상상력을 자극할 법한데, 실제로 전시회에 가보니 어른들 만큼 어린이들이 많았습니다. 반짝이는 눈빛들로 사진에 집중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지요.


https://www.erikjo.com/

ERIK JOHANSSON

Website of Swedish surreal photographer Erik Johansson.

www.erikjo.com

 

동화같이 천진하다가도 뼈를 때리는 리얼리즘을 보여주기도 하고, 특히 촌철살인의 작명 센스로 전율을 선사하기까지 하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인상깊었던 다섯 개를 어렵게 뽑아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 Looking for stars 

 

Looking for Stars, Erik Johansson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사진입니다.

 

제목이 "별 찾기"인데 별과 달은 하늘이 아닌 땅에 내려와있습니다. 망원경을 들고 하늘에 시선을 둔 남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액자 밖 외부에 있는 우리들의 눈에는 그것이 아주 선명히 보이지요.

 

제가 이 포스팅에 붙인 제목 "동화적으로 표현한 이면의 현실"이란 특히 이 사진을 염두해 둔 것인데요. 낭만적이기도 하고 동화같기도 한 이 장면 안에서, 저는 교훈이 실린 한 편의 우화, 혹은 누군가의 혜안이 담긴 한 권의 책을 읽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자신을 반추해보는 느낌도 들었고요.

 

"행복을 추구하는 한 너는 행복할 만큼 성숙해 있지 않다." (헤르만 헤세)

 

박웅현씨의 '다시, 책은 도끼다'에서 만났던 문장들입니다.

 

 "순간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이 완벽해야 한다. 
부족함 없어야 하고 바라는 게 없어야 한다. 
모든 희망의 극복이 필요하다." (카잔차키스) 

 

희망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지요. 하지만 모든 것에는 이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현실에 온전히 발을 붙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후회없이 살기 위해서는 일면 노력해야 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조금씩은 조르바처럼 자유롭고 거침없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싶은 욕망이 있을 테니까요. 저에게 큰 울림을 남긴 사진과 제목이었습니다.


# Leap of faith 

Leap of faith, Erik Johansson

 

전시회에서도 또 에릭 요한슨의 홈페이지 문구들에서도 “불가능”과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는 스스로의 목표가 현실의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를 담는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요소들을 가능한 한 현실적으로 보여게 만드는 것, 즉 "불가능을 담아내는 것(capture the impossible)”이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그의 사명인듯 합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어쩌면 그는 스스로의 작업을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신념(faith)을 갖고 도약(leap)하는 것, 불가능해 보이는 것에 도전하는 것, 곧 헬륨풍선 하나를 들고 허공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말입니다.

 

위의 컷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사실 실물에서는 남자가 올라간 계단의 한켠에 아래와 같은 팻말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Fly at own risk!"하는 문구도 시선을 끌지만, 그 아래 첨부된 문장이 압권입니다.

 

위 그림의 일부 확대컷입니다. 제가 촬영한 사진이라 빛반사가 있지만, 흰 팻말 부분만 봐주세요.
"You're responsible for your own actions. But if you never take risks, where would you be?"

 

실은 위험이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진 속 남자의 한 발은 이미 도약을 한 상태이고, 한 발은 아직 바닥을 딛고 있습니다. 그 아슬아슬한 상태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도 하지만, 한 켠으로는 두근 두근 응원하는 마음도 듭니다. 나의 모습 혹은 내 주변의 누군가의 모습이 이 남자에게 투영됩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불가능해보이는 것들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 Demand & Supply

 

Demand & Supply, Erik Johansson

 

“See the inseen”

 

요즘 제가 즐겨 읽고 있는 어느 블로그에서 만났던 문장입니다. 'BREEZEN'이라는 마케팅 관련 브랜드를 운영하시는 분의 글이었는데,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현상을 움직이는 건 "본질"이며 현상보다는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맥락에서였습니다.


저는 저 사진이 "the unseen", 즉 보이지 않는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날 선 현실인식, 혹은 통찰력이요. 에릭 요한슨은 저 그림에 재미있게도 '수요와 공급'이라는 재미없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 우리의 삶은 기본적으로 저러한 형상인지도 모릅니다. 내 발밑의 땅을 깎아 얻은 재료들로, 그 땅 위에 삐가뻔쩍한 건물들을 끊임없이 지어대는 것 말입니다. 그 끝이 파국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혹은 알면서도 우리는 멈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가 등장한 후로 벌써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는 오늘만 살 것처럼 눈을 닫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동화같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작품들 사이에서, 저렇게도 아름답게 냉철한 사진들은 엄연하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Soundscape

 

Soundscape, Ecik Johansson

 

초등학교 국어시간, 시의 심상을 배우면서 '공감각'이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문장이 공감각적일 수 있다는 것은 학교에서 배웠지만, 그림이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사진으로 격하게 실감했습니다. 

 

이 사진은 'Soundscape'라는 단어에 대한 시각화의 정점이 아닐까 하고요. 'Soundscape'는 '소리(Sound)'와 '풍경(Landscape)'이 합쳐진 '음악적 파노라마'를 뜻하는 단어로 에릭 요한슨이 새로 만들어낸 단어는 아니지만, 이만큼 그 단어에 딱 맞아 떨어지는 무엇은 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다 LP판을 나르는 두명의 수트입은 남자를 등장시킨 것 역시 신의 한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축음기와 풍경만 있었다면 이 정도의 임팩트는 없었을 겁니다. 생동감이나 함축성이 훨씬 줄었겠지요. 그의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지만 에릭 요한슨의 작품 안에는 스토리가 내재되어 있어, 관객들은 각자의 시선에서 그 이야기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매력적인 포인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이 작품을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경험이 있는데요. 조금 생뚱맞지만 밀도라는 빵집의 BI를 접했을 때였습니다. 밀도라는 단어를 'Meal'이라는 영문단어와 '°'라는 기호로 표현한 덕분에, 그 중의적인 의미가 직관적으로 느껴졌을 뿐 아니라, 따끈따끈한 식사로서의 빵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찾아보지 않고도, '밀도'의 '밀'에서 '식사'와 재료 '밀'이 떠올랐고, 갓 구운 빵의 따뜻한 온도가 연상된다는 게 참 신기했거든요. Meal의 M을 식빵처럼 표현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겠지요.

브랜드 '밀도'의 BI

에릭 요한슨의 'Soundscape'도, 밀도의 BI 'Meal°'도 저에게는 최고의 '공감각'적 이미지로 기억될 듯 합니다. 이렇게 기분좋은 예술, 그리고 디자인이 있다는 건 참 기분좋고 감사한 일입니다.



# Cumulus & thunder 

Cumulus & Thunder, Erik Johansson

 

마지막으로는 가장 사랑스러웠던 작품을 꼽았습니다. 전시회 메인 이미지로 사용된 'Full Moon Service'도 그렇지만, 이 'Cumulus & Thunder' 역시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천진하고 재기발랄한 사진입니다. '적운과 천둥'이라는 제목도 너무나 귀엽지요. 만약 한글 제목이 있었다면 '뭉게구름과 먹구름'쯤 되었까요.

 

여기서도 '양떼구름' 속의 그 뻔한 '흰 양'만 있었다면 재미가 반감될 뻔 했는데, 검은 양이 나와줘서 한층 다채로워졌습니다. 양털을 깎는 할아버지의 존재가 또한 ‘찐빵’속의 ‘앙꼬’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전시장에서는 이 작품의 윗쪽으로 입체적인 흰구름 모양의 구조물을 달아놓았는데 그 광경 역시 얼마나 사랑스럽던지요. 뭐니뭐니해도 에릭 요한슨의 매력포인트는 이러한 동화같은 상상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 Arms break, vases don’t 

Arms break, Vases don't / by Erik Johansson

 

다섯개만 꼽으려고 했는데, 에릭 요한슨의 해학적인 면을 못보여드리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 앵콜 개념으로 딱 한 작품만 더 추가하려 합니다. (사실은 아직도 맘에 들었던 것들이 아직 너무 많지만요.) 이러한 깜찍한 발상과 유머 역시 어찌나 매력적이던지요. 

 

팔이 아니고 화병이 부서지는 어이없는 상황을 상상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맥락적으로는 그러한 어이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 문맥에서는 이 작품 역시 현실의 이면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상 제가 반했던 에릭 요한슨의 전시 감상이었습니다. 한참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조심스러운 점이 많습니다만, 기회가 되신다면 한번 들러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말랑말랑하게 동심과 감수성이 살아나는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본문 사진: ⓒErik Jojans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