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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공 디자인상식

Ancient green을 찾아라! 그 초록을 찾는 법

안녕하세요.

감성을 깨우는, 조금 더 깊어지고 풍요로워지는 공간 '센티멘털 랩'입니다.

 

지난번에 이어 다시 색 이야기를 좀 남겨볼까 합니다.

색 표현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인데요.

 

 

 

 

 


요즘 저희 아빠는 영어소설 읽기에 빠져 계십니다. 간혹 이해되지 않는 단어나 관용구에 대해 물어오시곤 하는데, 이번에는 문장중에 등장한 “ancient green”을 찾아봐달라는 특명이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저에게 날아온 소설의 한 페이지.

 

 

 

 

 

 

저 밑줄친 ancient green이 이번 포스팅의 주인공입니다.

 

소설 주인공의 조카의 차량 색상을 표현한 단어였는데 구글링을 해봐도 정확한 컬러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고유명사는 아닌 듯 싶었습니다. 마침 시대별로 색상팔레트를 소개하고 있는 책을 읽고 있던 지라, '고대'에 사용되었다는 그린 색상들을 몇 보내드리며 그 즈음의 색감이 아닐까 싶다고 회신을 드렸습니다.

 

 

 

'마법의 색채 센스'에서 발췌한 고대에 사용된 그린 컬러들

 

 

 

문과인 저로서는 대략 느낌이 오니 이제 된거 아닌가 했는데, 공대 출신 저희 아빠는 똑 떨어지는 정답을 원하셨던지 영 만족하지 못하시는 뉘앙스입니다. 

 

"전문가도 모르네! 그럼, 할 수 없이 넘어가야지!"

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찾을 수가 없는 것이라 대답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찜찜합니다. 그 구구절절한 해명을 여기 풀어놓을까 합니다.

 

 

#1 엄밀하게 색이란

 

 

색이란 색상과 채도와 명도가 조합된 개념입니다. 이미 다들 아시는 이야기겠습니다만, 빨강 노랑 파랑 하는 색상(Hue)은 밝기(Value)와 순도(Saturation)에 따라 여러 톤 혹은 뉘앙스를 갖게 되지요.

 

 

먼셀의 색입체

 

 


빛의 색이냐 물체의 색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들도 있겠지만, 어쨌건 색은 A형 B형 하는 혈액형처럼 딱 딱 나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스펙트럼입니다. 색을 인식하는 사람의 눈이 고려되어야 하고요. 심지어는 색을 관찰하는 각도나 외부 조건 역시 변수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최대한 표준화된 조건 하에서 사람의 눈이 인식 가능한 단계로 쪼개어 색을 정의합니다. 그 유명한 RGB, CMYK, HVS 등이 그 기준이지요. 색체계에 따라 표기법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기본적으로는 색의 삼속성에 기반한 수치들로 정의됩니다. 포토샵에서 사용하는 16진수 색상값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 그래서 색의 이름은

 

 

정확한 컬러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색상 견본이 활용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번 포스팅했던 팬톤의 색상표도 그 예입니다. 올해의 컬러인 ‘클래식 블루’ 그에 해당하는 코드명, 그리고 그 색을 출력한 컬러칩 등 동일한 색상표를 공유할 수 있다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색을 보고 있지 않더라도 거의 동일한 색상에 대해 대화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색상을 표현하는 영명이 얼마나 많은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색상을 일컫는 명사에 형용사까지 더한다면, 정말 무궁무진한 색상 표현이 가능할 텐데요. 그러한 색명들마다 아래 사이트처럼 표준화된 표기법이 병기된다면 그러한 일반명사들로도 거의 정확하게 색상을 전달하고 전달받을 수 있을 겁니다.

 

https://encycolorpedia.com/named

 

Named Color Codes / Reference Chart

 

encycolorpedia.com

 

#3 ancient green은 뭣이 문제냐

 

 

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색상명들은 대부분 특정한 색상을 콕 찝어 지칭하는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코발트 블루'(C100,M58,Y0,K33)처럼 일정한 범주의 색상값으로 정의되고 있는 공인된 색상명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통용되는 색상명이라도 조금씩 다른 색상을 나타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Electric blue'라는 동일한 명칭이 업체마다 조금씩 다른 색감의 색상들로 해석되고 있는 것처럼요.

 

 

 

 

 

https://encycolorpedia.com/search?q=Electric+blue

electric blue - Search

hsl(206, 18%, 40%) / cyan: 0.31, magenta: 0.13, yellow: 0.00, key: 0.53 / LRV ≈ 13.1%

encycolorpedia.com

 

아마도 아빠가 읽은 소설의 작가께서는 플롯 상의 의도에 따라 특정한 분위기를 표현하고자 회심의 “고대의 초록”이라는 단어 조합을 내어놓으셨는데, 아쉽게도 그에 매칭되는 색상값을 남기지는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ancient green'찾기는 미완의 서울서 김서방 찾기로 끝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셈이고요.

 

 

#4 그리하여 결론

 

 

결국 똑떨어지는 답이 없는 문제였다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전히 객관적인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두 사람이 ‘구름’이라는 단어를 접합니다. 한 사람은 무시무시하게 태풍치던 날을 떠올립니다. 또 다른 사람은 대관령 양떼 목장에서 신나게 산책을 하며 만끽했던 하얀 몽실구름을 연상합니다. 어차피 세상에는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각자의 정의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적확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할 때는 표준화된 표기법이 필요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오히려 각자의 색깔대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건강하고 바람직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작가가 상상한 'ancient green'과 독자가 상상하는 'ancient green'이 조금 다르다고 한들 뭐 어떤가요. 그런 게 또 대화에 있어서의 여백의 미가 아닐지요.